novel/etc.

관계로그

Rangje 2015. 1. 27. 17:49



00. 나는 좋은 곳을 믿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01. 기억의 시작과 끝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당신의 옷,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아버지의 발걸음 뒤를 나란히 따라 걷는 나도 거기에 있었다. 나의 시작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내 세계가 되었다. 눈을 뜨면, 천장이 있었고. 내 세계는 딱. 내 방의 크기였다. 그 작은 방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커 청소년이라는 타이틀이 내 이름 앞에 붙게 된 날 까지도, 아버지는 내 이름을 올곧게 발음해 내시지 않았다.


유약. 이라고들, 하지. 병약이라고 하던가. 몸이 약했던 어린 시절에는 책을 읽으며 지냈다. 시를 읽고, 글을 썼다. 어린 마음에 달려가 아버지에게 매달리면 차디 찬 시선만이 돌아왔고,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차마 옷자락을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시 방에 들어가 시를 읽었다. 내일의 운세를 점쳤다. 눈물이 날만치, 따뜻한 말들이었다. 나에게 해주는 말과 같이 보드라운 말. 모두, 아버지에게서 듣고 싶던 말들이었다.


- 이봐, 자네 아들은 요즘 어떤가.

- 영, 글렀어. 말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다룬다고.

- 거, 그래도 아들녀석에게 잘 해주지 그러나.

- 내 피가 섞인 아들일리가 없네. 그런 녀석이.


아버지의 절친한 벗들은, 언제나 빈 소리를 냈다. 텅 빈 공간에서 텅,텅,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 날엔, 늘 한참, 멀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밟아 내 방으로 향했다. 나의 세계는 유약했으나, 완벽했다. 



02. 아버지가, 총 쥐는 법을 알려주던 날, 나는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눈 앞에 불이 튀는 느낌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거리는 느낌에, 놀라 눈을 바로 뜨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글렀어. 이 놈은. 우리 가문이 어떻게 될지. 쯧쯧, 하고 혀를 차는 그 두 음절이 가슴께에 와닿이 박히는 느낌은 무어라 말하기 힘들었다. 


- 아버지, 저...저, 연습. 연습할게요. 기대에, 부..부응하실 수 있도록.

- 됐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 그만둬요, 필립, 너무 그러지마요. 주변 사람들 창피하게...


아버지를, 말리는 어머니의 말,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분노케 했는가에 대해, 방에 들어와 얼얼한 뺨을 쥐고 생각을 하자면, 한참을 골몰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는 늘 내 두 어깨를 짓눌렀다.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던 사람, 당신에게 나를, 나로써 인정 받고 싶었다. 



03. 


- 나가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그렇게 쉬운 소리로 끊어 낼 수 있는 연이, 아버지와 아들의 연이라면, 나가겠노라.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선언을 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았고,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숨겼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 한 것들이었다. 완벽하게 짜여진 것틀을, 깨 부수고, 처음으로 내 의지로 선택한 길이었다. 잘 만들어진, 아버지의 길이 아니었다. 


스카웃 제의를 받아든 나는, 의문스러웠다. 나를. 쓸모 없는 나를 왜.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릿하게, 나를 필요로 한다.는 문장을 발음해내며,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내 세계를 배신했다. 




04. 그렇게, 처음으로 선택한 내 길은, 따스했다. 내 스스로 만든 인연들은 보드랍기 그지 없었다. 


- 잘 부탁하네. 

- 필립은, 내 다섯번째 동생을 닮았어. 

- 제 코드네임이 우스우시다면, 펭귄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다정히 대하느냐, 물을 수는 없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을 벗어나 이제사, 진짜 가족을 찾은 것 마냥. 우습지도 않게, 형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서툴게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나아가는 길엔 아버지의 발자국은 없었다.


- 아버지.

- 자네 아버지가 들으면, 슬퍼 할 걸세.


아뇨, 그럴리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서 한결같이, 대답했었다. 아버지는 저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걸요. 지금 다시 돌아가 아버지, 하고 부르며 총을 쏘고 꼴 같잖게, 스파이가 되었다며 이야기를 한들, 아버지는 거들떠도 쳐다보시지 않을 겁니다. 턱끝으로 차오르는 이야기들을 내뱉지 않고 가만히 가라앉혔다. 


- 너는 지금, 충분히 열심히하고 있어. 걱정하지마.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소리야.


바른 길, 그건 뭐죠. 하고 반문하고 싶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걸까. 너무 의미를 두지 말자, 가볍게 생각하자고 생각했으나, 어느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제 가족보다도, 이들이 더 가족답다는 것을. 


- 괜찮습니다. 너무 진상이지도 않았고. 동생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요.


어떻게, 그렇게 나를 인정해 줄 수 있는가. 묻고 싶었다. 제대로 하는 것 하나 없는 스스로를 잘 했다며 쓰다듬어주고, 칭찬해 줄 수 있는가. 묻고 싶었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사라질까. 


잔소리를 듣고, 혼이 나고, 같이 농담을 따먹다가도, 진지해졌다가. 서로의 편을 들며 웃는 시간들이 지났다. 일말의 사건이 터지고,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즈음에, 내가 물었다.


- 이것도, 현실 도피가 아닌가요. 


가상의 가족을, 만드는 것도. 현실도피가 아닌가요. 고작 놀이에 지나지 않나요. 제가 이, 관계에 이렇게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요. 장난으로 시작했다고 한 일들이 파도처럼 치밀었다. 쉽게, 형이라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여 만들어진 인연이. 과연 진짜 피를 나눈 가족보다 두터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질문 조차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늘 그렇게, 말문이 막혀, 다시금 입을 닫을 때 쯔음, 그들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나는 가만히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납득했다. 그토록 목 말라 했던 가족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리라. 내 발자국도 더는 외롭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