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술에 취해 어지러운 시야사이로 한 여름의 후덥지근한 새벽바람이 볼을 스친다. 알코올에 절어 저릿한 손을 오무렸다, 다시 폈다. 아, 취한다. 괜히 소리내어 발음해보고는 잘 닦인 보도 블럭 위에 떼라도 쓰듯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세상이 도네. 고개를 움직일때마다 늘어지듯 따라붙는 빛의 잔상이 귀찮았다. 속이 매스껍다거나, 쓰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술이 잘 받는 날이었다.
오늘처럼 혼자 술을 꺾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연애에 실연을 당하게 되면 친구든, 남이든 마주보며 술이 들어갈리가 없다. 막상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 늘 생각해왔던 시나리오대로 죽니 사니, 핏대높혀가며 소리라도 지르리라는 다짐과는 다르게, 소리다운 소리도 못 질러보고는 그래, 하고 대답 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처량했다. 이후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전화를 끊고 궁상맞게 터덜터덜 걷다가, 아무생각 없이 들어온 바가 그와 자주 들렸던 곳임을 인지했을 때는, 스스로에게 짜증까지 일었다. 다시 나설 기운도 없이 의자에 앉아 내 몫의 알코올을 뱃속에 흘려넣으면서 한 생각이라고는 왜 나는 이러고 있을까. 하는 자괴감과 후회만 남은 한탄뿐이었고, 결국 이럴거면 뭣하러 사귀겠노라 떵떵 소리를 쳐댔는지 스스로가 얄궂게도 원망스러웠다.
좆같은 인생. 난 왜 맨날 이럴까. 까끌한 보도블럭 사이사이 자라난 잡초들을 무심코 가만히 바라보다가 홧김에 손에 잡히는 놈들을 몽땅 쥐어 뜯어놓고는 이제사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세시가 다되어간다. 돈은 이미 다 술값에 꼴아박아서 택시는 못타겠고, 버스는 끊겼고. 그냥 여기서 잘까. 범람한 알코올에 잠식당한 뇌는 이성을 마비시켰다. 난 면허도 안따놓고 뭘했지. 하는 생각까지 닿고는 술꼴으면 운전하면 안되지. 스스로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이 씨발! 끓어오르는 성질을 풀 곳이 없어서 괜히 핸드폰의 액정이나 거칠게 문지르고 두들겨 대다가, 무릎을 접고 고개를 박았다. 되는 것도 없어. 나는 병신이야, 응.
집엔 어떻게 간담. 한 여름에 술 집 도로 앞 보도블럭, 시간이 시간인지라, 인적도 드물고, 집은 멀고. 그 인간 집은 가까웠다. 장소 선정 진짜 병신이다, 응.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킬킬 나온다. 찾아갈 수 도 없고. 한숨처럼 내쉬는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그 사람 집앞에서 잘까. 신고 당하겠지. 시간은 왜 이렇게 안가, 해는 언제 떠. 혼잣말 처럼 한참을 중얼대다 다시 하릴 없이 시간이나 확인하려 켠 핸드폰 화면이 이상했다.
" 뭐야 이거. "
" ...쉰 새벽에 전화를 했으면 좀. 제대로 통화를 하던가. "
" ....뭐임 이거, 응 "
니 새끼가 걸었잖아. 짜증이 묻어나는 잠긴 목소리에 몽롱했던 정신이 퍼특 깨는 것도 같다.
" 나 저나 안했눈데, 응. "
" 아, 미친놈아. 혀 짧은 소리 내지마. "
술에 절은 내 혀가 꼬이는지 새끼가 역정을 낸다. 전화가 왜 걸린거지?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가며 열심히 생각해봐도, 통화 버튼을 누른 적이 없는데. 아. 설마 아까 액정 마구잡이로 쳐 누를 때 걸린 건가. 근데 걸린 놈이 하필이면 쟨가. 와 오늘 운수 진짜 존나 구리다.
" 돼쓰니까 끄너. "
" 술 냄새가 여기 까지 난다. 어딘데. "
" 아- 돼따고, 좀 끄느라고오. "
" 이 병신아. 거기 가만 앉아 있어. 갈테니까. "
니가 뭘 알아. 울컥하는 마음에 못 다 지른 고함이라도 지를 요량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니가 뭘 아는데!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맥없이 전화가 끊긴다. 치사한 놈.
***
병신새끼. 잘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열심히 놀려 간신히 차에 타자마자 욕을 얻어 먹었다. 초조하게 담배를 빼어 물길래, 나도 줘. 하고 손을 내밀었다가 지랄한다. 다시 욕을 얻어 먹는다. 뭐 한다고 술을 이렇게 쳐 마셔. 자다가 막 깼는지 잠긴 목소리가 가시가 돋혔다. 화도 잘 안내는 애인데. 단단히 짜증이 난 것 같다. 사실 연락도 안한지 거의 한달이 넘어가는데, 갑작스레 온 전화가 술에 취한 옛 애인의 푸념이라니. 나라도 짜증날 것 같다.
이 놈과는 친구에서 발전한 연인관계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킨쉽을 하고, 서로를 챙기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오랜시간을 알아왔고, 그 시간들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 채왔다. 만남은 오래가지도 못한 채 다시금 백지화가 됐고, 우리는 친구가 아닌, 옛 연인이 된 채로 관계는 녹이 슬어갔다. 그리고 둘 다 녹이 슨 관계를 닦을 생각을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는 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 못했다.
이 새벽에 빈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는 게 낯설지는 않았다. 매끄럽게 깔린 아스팔트에 칠해진 페인트가 한 줄이 된 것 마냥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 자주 이러고 놀았는데,응. 의미없는 말임을 알기에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담배연기가 매캐하게 코끝을 감돌다 사라진다. 술은 술대로 그득그득 채서는, 현재 사귀던 사람에게도 시원스레 차이고, 내가 걷어 찬 사람의 차를 얻어 탄 채 집으로가는 길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일 당장 접싯물에 코박고 죽어도 시원찮을 수치스러움이었다. 이게 무슨 진상일까.
히단은 그 이후로 나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냐, 뭣 때문이냐, 이것저것 물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놈 답잖게 조용히 담배나 태우고 있는 옆모습을 흘긋 흘긋, 보다가. 끝내 물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술기운을 빌려 입밖으로 내뱉으려 운을 띄웠다.
" 야, 있자나. "
어차피 부리던 진상 더 끝장나게 부려보자, 싶어 입을 떼는데 놈은 별로 듣고 싶지않았는지 대답이 없다. 야, 있짜나... 술기운에 가물가물한 눈을 느리게 꿈뻑거리다가 다시 한번 발음해냈다.
" 내가 글-케 별룬가... "
차 시트에 늘어져, 이런 꼴 같잖은 소리를 해대는 내가 짜증났던지 놈이 피던 담배를 이내 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 심야의 텅 빈 도로를 속도하나 줄이지 않고, 걸리는 신호 족족 보란 듯 무시하는 놈이 까칠하게 입을 열었다.
" 무슨 말이 하고 싶... "
" 나 차였어, 응.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익- 차가 거칠게 멈춰서고, 반동 덕에 호되게 창문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아, 아퍼. 저거 일부러 그랬지. 아이씨. 아퍼. 하고 이마를 문지르며 무섭게 쏘아보자마자 같잖게도 손짓으로 신호등을 가르켜보인다. 빨간불이잖아. 능구렁이 같은놈.
" 꼴 좋네. "
저 새끼 뒤 끝은. 괜히 노려보다가 이마를 마저 문지르고는 다시 차시트에 몸을 구겼다. 그냥 오늘 갑자기 차였어. 사이드미러로 비치는 가로등이 네온사인처럼 깜빡거린다. 다시 출발하는 차의 속도에 따라 늘러붙든 끈질기게 따라붙는 빛의 잔상에 눈이 부셨다. 이별은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소나기마냥 그냥 닥쳐온 일이었다.
꼴 좋다는 말을 끝으로 히단은 다시 입을 다문 채 차를 몰았고, 나 역시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날도 좋았고, 여느때처럼 지각도 없었고, 자고 일어나 개운하게 눈을 뜨고 옷을 고르고, 만난지 10분도 채 안돼서, 만남이 끝이 났다. 얼이 빠져 반박도 못하는 나를 두고 일어선 그를, 채 잡지도 못하고 혼자 십 분 남 짓 더 밍기적대다가, 차마 따라갈 자신이 없어, 건 전화기 사이의 목소리는 늘 듣던 것의 온도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래도 위안이 되고, 그 사람도 그러리라 믿었던 것 같다. 조금은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사람이지만, 언뜻 나를 향한 웃음이 소름끼치도록 좋았다. 그런 완벽한 사람의 시선의 끝에 내가 있다는 건, 그 누구도 모를 성취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 뭐가 문제였지. "
판판한 아스팔트길 뻥 뚫린 심야의 거리가 아득한 터널처럼 느껴질 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히단은 글쎄, 질렸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저에게 한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래 질렸을지도. 부드럽게 차가 코너를 돌고, 눈 앞이 희붐해졌을 즈음에,놈이 잠시간의 침묵 후 말을 꺼냈다.
" 병신새끼, 그래서 이 시간까지 차도 없는게 퍼마시냐. "
아무튼 너는. 쓸데없이 혀까지 차며 나를 질책하는 놈이 이상하게도 살가웠다. 어차피 술마시면 차 못 몰거든 미친노마. 베베 꼬인 혀를 최대한 풀어가며 같이 혀를 차니 비웃음을 샀다.
" 집에 들어가서 발이나 닦고 자. "
" 걍, 같이 자자, 응. "
" ...개소리 말고. "
칫, 농담도 안 받아주네.
" 아님 맥주라도 사서 이차? 콜!? "
" 자라, 좀. "
새끼가 많이 야박해졌네. 쉽게 포기하고는 일으킨 몸을 다시 뉘었다. 이별이 여름의 끝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로멘틱 했을까. 바람도 선선하고, 낙엽도 지기 시작하는. 한 여름 고막을 찢을 듯한 매미소리에 시달리며 처량히 사십분을 넋 놓고 땀을 뻘뻘흘리며 걷지 않아도 되잖아.
" 아니면 우리 다시 사귈까? "
" 아서라. "
한 번 찼으면 됐지. 고개를 가로 젖는 놈이 괜히 얄궂어 킬킬 웃었다. 아마 놈도 웃었던 것 같다.
" 날 차다니 존나 후회할거야, 응 "
" 집가서 자살하지 말고. "
안 해, 미친놈아. 문을 열고 휘청거리는 걸음을 바로했다. 술이 좀 깨나. 싶더만 한 걸음 내딛고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부축해주는 놈이 꽤나 귀여웠다. 고마워. 평소에 자주 하지도 못하는 말을 알콜에 그득 취해 말하니 들어가서 자. 매몰찬 답이 돌아왔다. 야 그래도.
" 그래도, 아까 내가 했던 말 잘 생가케 봐. "
" ...오냐. "
안녀엉. 손을 휘적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발을 벗어놓고 거실 쇼파에 엎드려 얼굴을 묻었다. 거실에 걸린 시계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린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됐구나. 로멘틱 함이라고는 뭣도 없는 내 연애가 또 한 번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