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B에게, B가 C에게.
00. 바람이 성기게 불던 날이 었다. 나는 첫사랑을 잃었고, 황망하게 시린 공기가 내 마음까지 차게 얼리는 밤이었다. 까끌해진 손톱 밑을 무심코 다듬다가 괜시리 눈물이났다. 나는 당신이 쓰던 시를 끝까지 읽어내고 싶었다. 담담하게 소리내어 읽고 싶었다. 무기질처럼 담기던 당신이 써내린 활자들을, 맘 속 깊이 읽어내고 싶었다.
그런 밤이었다.
01.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과제가 많아서 잠이 부족했다. 늘 영양제다 뭐다 입에 달고 살아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깼냐? 잠이 중요한거야. 이제 막 목업을 끝냈는지 사포로 다듬던 손이 멈춰선다.
" ...뭐야, 벌써 끝났어? "
목소리가 쉬어빠졌다. 작업실의 공기는 건조하고 까끌했다.
" 아니, 이제 세번째인데, 한참 더 해야지. 나 젯소 좀. "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는 놈에게 니가 가져가 해.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래 더 자던가. 무신경한 목소리가 들리고 코를 찔러오는 냄새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나가서 해 씨발놈아. 짜증스레 말을 붙이자, 일어나자마자 욕은. 투덜대는 소리가 돌아왔다.
" 넌 과제 다 끝내고 자냐 "
" 닥쳐, 안 해, 응. "
오~ 교수한테 개기나보네. 킬킬대며 신문지 위에 모형들을 늘여놓던 놈은 젯소를 말릴 시간동안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벌써 졸전이냐. 시간 존나 잘간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히단은 기지개를 켰다. 사실 이렇게 퍼지르고 잘 시간도 없거니와 다른 과 작업실에서 친구와 이야기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러고 있는 내가 민폐일 법도 하건만, 과방에서 과제하는 사람은 나나 쟤 밖에 없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엔 집으로 돌아가니까.
" 개기는게 아니라, 못 그려 "
놈의 말에 대답해주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푹 꺼진 쿠션이 딱딱하다. 새로 사야겠네. 멍한 머리를 흔들다가 쳐다 본 저 멀리 책상엔 굳어가는 물감이 삐쩍 골아있다. 물감냄새. 물 비린내. 붓의 눅눅한 느낌. 덜 마른 캔버스. 캔버스 위로 흘러내리는 물감이 어쩐지 애처로웠다.
" 왜 못그려. "
" 니가 알아서 뭐하게, 병신아."
못 그릴 이유는 뭐야. 히단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이유를 줄줄 불어댈 수는 없었다. 까드득 까드득 마우스 휠 내려가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멍을 때리다 나 역시 기지개를 켰다. 그림을 더 그릴 수는 없었다. 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못 그렸다.
뒤 축이 눌려 짜부러진 슬리퍼가 거슬리게 찌직찌직, 구슬프게 소리를 낸다. 슬리퍼도 바꿔야겠네. 바꿔야 할 것 투성이다.
02. 나 잠깐 내려갔다 올게. 어차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있는 놈이 그래, 대충 대답했다. 괜히 맥이 빠져 가만히 파레트를 쳐다보며 손으로 쓸어 보다가. 카드늄 옐로우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인디고도, 버밀리온도 들고와야지. 부족한 물감을 눈으로 헤어려 보다가 아래층에 위치한 회화과 과방으로 향했다.
아, 그래. 후커스 그린도 들고와야겠다.
03. 내내 망설이다 종내 물감을 짰다. 파레트에 얌전히 누워 있는 물감을 문지르고, 섞었다가 물로 풀어냈다가, 하릴 없이 괴롭히고 나서도. 나는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그 날 밤이 생각나고, 다시금 눈이 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차갑게 얼어 있던 밤 혼자 걸어내던 그 캠퍼스의 거리가 어찌나 시렸는지 알 길이 없다.
그와 헤어지고 찬 바람에 온통 시달린 빨간 뺨이 얼어터질 때까지 나는 내내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연신 얼어 붙을 것 같은 손을 비벼가며 길을 오르던 내가. 귓볼을 때리 던 찬 바람에 못 이긴 척, 흘러내린 눈물을 주워섬기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자 기가 막히게도 바람이 멈추던 그때를 기억한다. 바람이 멈추고, 시간도 멈췄다. 기억도, 마음도 모두 거기에 두고왔다.
나는 망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붓에서 느른하게 흐른 붉은 물감이 손을 타고 미끄러졌다.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 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왜, 여기서 삽질을 하고 있을까.
다 끝난 일이야. 조곤 조곤, 당신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04. 밥 먹고 해. 한참을 뭔가 만지작 대던 놈이 배가 고팠는지 해가 지평선에 걸릴 즈음에 말을 걸어왔다. 밥을 먹어야 과제를 하지. 놀리는 건가. 조금의 진전도 없는 그림을 똑바로 쳐다보다 히단이 말을 이었다.
" 너, 그냥 다른 그림 그려. "
대책도 없어. 베알이 없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완성 할 거야. 그러기로 마음 먹었어.
" 그럼 질질 짤지나 말던가. "
어쩐지 짜증이 묻어나 있다.
04-1. 배달음식이 지겹도록 입에 물렸다. 텁텁한 입맛에 탄산음료만 내리 마시다가 관뒀다. 아, 과제하기 싫다. 늘 하는 소리를 또 입 밖으로 내뱉었다. 히단은 답잖게 조용히 밥만 먹더니 그러니까 다른 그림 그려. 다시 종용해왔다. 니가 뭔데 그래. 나는 괜시리 짜증을 낸다.
" 아무튼 베알도 없어, 등신새끼 "
고개를 젓는 너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맞다. 나는 베알이 없다.
04-2 삼학년이 끝나고, 사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늘지 않는 그림, 한계점에 다다른 느낌에 몇 번이나 갈증이 일고 화가 났다. 내 끝이 고작 이런 밋밋한 바닥이라는 것에 분노했다. 내가 고작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대단해야 했다.
아등바등 기어 올라가 선점한 것들은 내 손에서 모두 부서져 사라졌다. 잘하긴 하는데 재능이 없어. 그렇지? 흘려 지나가는 말들에 베이는 날도 많았다. 감각이 없다. 재능이 없다. 노력은 많이하는데, 안타까워. 이런 말들은 나를 함락시켰다. 무너져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시를 썼다. 아주,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시를 썼다. 으레 그렇듯, 유려하고 말랑 말랑하지도 않고, 아주 가라앉은 어조의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첫 인상은 대략 그러했다. 가지런한 글씨로 글을 써내려 가던 그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염세적인 글들을 읽다보면, 어쩐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다가도, 느른하게 흘러가던 기운에 사로잡히고는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세계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세계의 그를 좋아했다.
이름을 기억해두고 두고두고 읽던 글의 주인을 우연찮게 교양수업에서 만났다. 그는 글을 닮아있었다. 아니, 글이 그를 닮았다고 해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제법 드물게 싹싹히 말을 붙였고, 그도 그다지 밀어내지는 않았다. 무심하고, 나른한 사람이었다.
' 있잖아요, 나는 그 쪽이 쓴 글이 진짜 좋더라구요, 응 '
봄.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볕이 제법 좋았으니까. 내 말에 그가 의아하다는 듯 눈짓을 해왔으나 애써 눈을 피했다. 어거지로 끼워 맞춘 조별과제 수업에서 뜬금 없는 주제로 말을 붙여오는 사람이 의아할법도 한데, 그는 어디서 내 글을 봤냐는 둥, 흔한 말 한마디 건내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당시 내가 조바심이 났음에 분명하지만 더 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활자안의 세계에 내가 들어가고 싶다는 막역한 생각들을 거두고, 내 색을 그에게 물들이고 싶어졌다면 이건 조금 웃기는 이야기인 걸까.
한참을 뜸들이던 그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나는 그의 고맙다는 말에 활짝 웃어보였다. 나는 애석하게도 욕심이 많았다.
05.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좇았다. 손을 뻗었다.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신에 차 있었다. 내 색으로 물들여놓고, 내 옆에 두고 싶었다. 그에게서 나에게 나는 흐린 물감내가 난다면, 그것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졸업작품 역시, 당연스럽게도 그를 그리고 있었다. 볕이 드는 창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 그 시선 끝의 잉크가 잔뜩 묻은 손끝. 나의 시선 끝에도 그가 언제나 존재했다.
스케치를 하던 나를 보던 놈은 혀를 찼다. 코가 뀄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코가 뀄다. 지금도. 아니, 코가 아니야. 내 몸뚱아리 전체를 꿰고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내 물감내로 그를 물들이는 대신, 나는 그의 잉크냄새에 흠뻑 젖어있지 않았을까. 마약이라도 한 듯, 알싸한 잉크냄새. 코끝을 찡긋거리며 맡아내다 이내. 엎질러져버린.
' 미안합니다. '
짧은 말을 기억한다. 속살거리듯 내려앉은 말을 기억하고 있다.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요. 왜 안 되는데요? 늦은 밤, 어스름했던 그 밤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다시금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잉크로 물든 손 끝이 까아맣게, 까맣게. 물들어서 지워지지도 않는데.
나의 형편없는 마음이 펜으로 벅벅, 지워지던 날, 나는 그림에 마악, 밑색을 발랐던 날이었다.
00.
첫 사랑이라는거 다 부질없는 짓이야. 혼잣말 처럼 한 숨처럼 내뱉자 옆에서 작업을 하던 놈이 코웃음을 쳤다. 첫사랑같은 소리하네. 그건 첫사랑도 아니야. 마우스를 딸칵거리던 놈이 옆에 다가와 말을 붙였다.
" 그러니까, 그림 엎자니까. "
" 니가 그려줄 거 아니면 좀 닥치자, 응. "
그건 짝사랑도 아냐. 첫사랑도 아니고. 그냥 너 혼자 했던 쇼지. 놈은 꽤나 정확하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맞아. 그건 나 혼자 했던 쇼다. 고집을 피울 수도 없을만치리. 지독하게 혼자 했던 생쇼.
캔버스 앞에 앉아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혼자 색을 바르던 버릇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때의. 내 그림 속의 그는 어딘가 침잠하고 있었다. 어디로든, 가라앉을 것 같은 사람. 내 고백을 고작 다섯글자로 축약했던 그는 어느새 사라졌다. 휴학인가, 아니면 어디론가 가버렸을까.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착각이라도 한 걸까. 병신같이 눈물이 났다.
물감이 꾸덕꾸덕, 말라 붙었다. 물감 범벅인 손끝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물 비린내가 비릿하게 올라오는 느낌에 코끝을 비비다가 못내 울어버렸다. 당신의 마음 언저리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당최 존재는 했던지. 묻고 싶었다.
" 씨발..."
흐느끼듯 울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 진상피우지 말고 새끼야. "
등을 가만히 토닥이는 손이 못내 따뜻했으나,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잉크내가 코를 간질였다.
***
저번에...뭐지... 전력 주제 전공?..이었나 여하간...그거 때문에 쓰던 글인데 1시간만에 다쓸 수 있을것같았으니 쓰지못할 것 가타서
걍 미뤄뒀다가..ㅇㅇ..이제사 마무리.
호흡이 굉장히 빨라져서 나중에 이거 다 뜯어고쳐야할듯싶다만서도 그냥..뭐...한방향 사랑이 보고싶었던거같은데
죽도 밥도 안됐죠잉. 내 글이 그렇지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