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wn
2014/02/17 02:23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2
사소리 / 히단 none커플링.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빗 속에 늘 우산을 쓰고 걷던 너는 없다. 그것은 미련과도 같은 것, 환영에 흐려지듯 부서지는 네가,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 다만, 웃는 네 얼굴만은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는데. 그건 집착과도 같은, 욕심이었다.
***
바닥이 노곤하게 따뜻했다. 손바닥을 방석밑으로 넣어 손을 녹였다. 손가락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칼바람을 뚫고, 간신히 자리한 장례식장엔 평소에 익히 보던 얼굴들이 즐비했다. 다들 파리해진 인상으로 조용히 국화 꽃을 놓았고, 빛바랜 사진에는 웃기지도 않게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내가, 아는데 그 놈은 지금 이 분위기가 숨막히도록 싫을테다. 금방이라도, 뭐하냐 니네, 누구 죽었냐. 하고 어디서든, 농을 치며 나타날 것 같은 너는, 고작 뼛가루가 되어 돌아왔다.
조용했던 분위기에서 하나 둘 각자 이야기를 꺼냈고, 그 녀석의 이야기로 시작했던 이야기들은, 어느새, 자신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변질 돼, 퍼져 나갔다. 어쩌다가.... 교통사고였대. 짧은 단어로 갈무리 지어지는, 너의 일생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죽어도,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 처참히도 굴러간다. 가만히 듣던 이야기가, 주식 이야기로 무르익을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떠들던 동창놈들은 내가 일어서자 그제야 어디가냐고 아쉬운 듯 운을 뗐다. 담배 피러, 짧게 대답하자 그들이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으며 자리를 떴다. 갑갑한 새끼들. 어지럽게 즐비한 똑같은 검은 구두들 사이를 뒤적여 신발을 찾아 신고는 터덜대며 로비로 나와 현관문을 열자, 찬 바람이 볼을 스친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현관까지 튀여 금세 구두를 적셨다. 새 신발인데. 구차하게 입을 털고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이자, 그제야 숨이 좀 트인다. 왜 비까지 오냐 처량하게. 추적추적 순식간에 아스팔트를 적시고, 찬 바람에 따갑기까지한 빗줄기에, 눈도 아닌 우박이 내리는 것 처럼 차디 찬 겨울 날이었다.
찬 바람 맞으면서 피는 담배는 존나 쩔지. 장초 였던 담배는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금세 필터까지 타들어갔다. 한 개피만 더 펴야지 싶어 주머니를 뒤지는데, 익숙한 차가 현관 앞에 주차 되어 눈에 익는다. 뭐야, 언제 왔어. 고개를 돌려 장례식장 안을 살펴도 차 주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이 새끼도. 담배 한 개피를 다시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데 지랄 맞게도 그 잠깐 사이에 라이터가 습기를 머금었는지, 불이 붙지 않는다.
" 에이 씨발. "
몇 번 시도하다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불도 붙이지 못한 장초 필터나 씹고 있자니, 제법 기분이 처량해졌다. 라이터 빌리러 다시 들어가봐야겠다. 싶어 고개를 드는데 언제 왔는지 그제야 익숙히 보여야 할 붉은 머리가 멀끔히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올라오는 놈에게 반가운 척을 하며 인사를 했으나,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놈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라, 욕은 속으로만 곱씹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묘한 타이밍으로 등장한 사소리덕에 들어갈 타이밍을 놓쳐 머뭇거리며 그가 먼저 문을 열기를 기다리자 열라는 문은 열지도 않고 옆에 버티고 섰다. 추워 죽겠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뭐하나 싶어 쳐다보니 나는 안중에도 없는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물고는 불을 붙인다. 차마 라이터를 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에라, 하고 들어갔다 와야지 싶어 몸을 돌리는데 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라이터를 건내는 손에 멈춰섰다.
" 웬일이래. "
나한테 손 닿는 것도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남은 말은, 대충 구겨서 삼켰다. 고맙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코를 훌쩍이며 내가 말하자, 사소리는 대답 대신 담배연기를 뱉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추위건, 더위건 타지않을 놈도, 코끝이 빨갛다.
" 좀, 늦게 왔네. "
받은 라이터는 손쉽게 불이 붙었고 들이마신 담배연기는 텁텁했다. 이거 참, 라이터도 간신히 얻어 피는건데, 더럽게 맛이 없네. 라이터를 돌려주며 넌지시 던진 말에, 사소리는 말이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라, 미련을 버린다. 놈의 심정이 어떤지는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데이다라의 죽음 앞에 태연하지 않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얼마나, 취한 정신으로 찾아 헤맸던가. 그 일은 다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일이 었다. 손으로 가리고 싶던 일이었을 테다, 놈에게도 나에게도.
녀석의, 사고 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가. 그 날은 기억이 온전치 않을 법도하다만, 야속하게도 너무나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내 평생 느낄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글로만 읽어 오던 느낌을. 온 몸으로 부딪혀 온 죽음은 갑작스럽게, 데이다라를 채갔다. 회사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내가 어떻게 회사를 빠져나왔는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리고 난 뒤는, 이미 병원 안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도 못하고 한참을 헤매다, 결국엔 안내 데스크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를 들어냈다. 간호사의 입에서 선명히 발음 되는 '즉사'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의 데이다라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귓 구멍을 파먹은 단어는 곧 생각을 좀먹었고, 괜찮으신가요. 하고 물어오는 간호사에게 아무런 대답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돌아섰다.
" 야. "
기억이 다시금 생각을 좀먹기 시작하자, 나는 생각을 멈췄다. 이렇게라도, 나를 지켜야했다.
" 술이나 마시러갈래? "
아무생각 없이 던진 말에, 여즉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사소리는 담배를 비벼껐다.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차키를 꺼내들었다. 운전은, 내가 특별히 할게. 분위기에 맞지 않는 농담을 억지로 꺼낸다. 분위기를 띄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만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수단에 가까운 농담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고, 어떻게든, 생각이 엄습해왔다. 해일마냥 마음을 쓸어가버리는, 처참히 남은 상처는 아물지도 않고, 그렇게 거듭해서, 덧이 난다.
***
술 집은, 늘 그러하듯, 시끄러웠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분위기의 테이블이 있는 반면,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에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도 스쳐지나 가는 눈길에 보였다. 굉장히, 바빠보이는 종업원의 안내에 대충 최대한 구석 자리에 자리를 갈무리하고 마주 앉자, 그제야 나는 내 앞에 마주한 남자가 얼마나 낯선 술 상대인가를 인지해냈다. 사소리와 단 둘이서 이렇게 마주앉아 마실 일이, 있을 거라고는, 나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물론, 저 녀석도 마찬가지 일테다. 신기한 조합이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색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공기에, 평소에 늘 남에게 미루던 물을 따라 건냈다. 잠깐 내려앉은 침묵 속에, 이주만에, 처음 보는 얼굴을 마주했다. 행색이 좋을 수 가 없을터인데, 사소리는 여전했다. 단정하게 다려진 셔츠깃과, 소매끝단, 손목에 걸린 시계 역시, 여전하건만. 뜯어 봐야지만 보이는 흐트러진 넥타이와, 금방이라도,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푸르스름하게 붉은 빛이 띈 눈가는, 여실히 너의 빈자리를 느끼게 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도 무너지는구나.
" 주문하시겠어요? "
그 흔한 메뉴판 한 번 들여다 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던 우리의 침묵을 깬 건 점원이었다. 젖은 손을 닦으며 바쁘니 어서 말하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에 급하게 술 몇 병을 시켰다. 안주는 안 먹지? 물음에 사소리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다시 담배를 꺼내든다. 점원은 내가 부르는 주문을 급하게 받아 적더니, 곧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요. 하고 자신을 애타게 찾는 다른 손님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열심히 일하네. "
어색함을 깨보겠답시고 붙인 말은 끝내 주인을 찾지못하고 공중에 흩어진다. 사소리는 여전히 말없이 담배를 폈다. 연기와 함께 던져진 텅 빈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턱을 괴고 하릴없이, 물잔에 비친 조명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시선을 옮긴 곳에는, 아까 그 퉁명스러운 알바생이 들어찬다. 많아봐야 대학 2학년생으로 보였다. 짧게 커트친 단발은 염색이 빠져 흐릿한 노란색으로 지저분하게 얽혀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여도, 꽤나 열심인게, 어이없게도, 첫만남의 너와 너무나 닮아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생각이 머문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왔던가. 사실 날씨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비가 왔고, 제법 날이 더웠다. 그래 여름이었던 것 같기도하다. 분명 기억하고 있다. 평소에는 뭔 커피가 밥보다 비싸냐며 들리지도 않았던, 커피숍이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지만,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보면 너는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처음으로 들린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단골이 될 수 있었다.
오늘 비가 많이 오네요. 특별하지도 않은 멘트로 처음으로 말을 걸었을 때, 당황한 얼굴은 흔한 아르바이트 생에게서 볼수있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네요. 어색하지 않게 대답해주며 주문을 확인하고는 장마라 그런가봐요. 하고 거들던 모습이 선연하다. 그렇게 매일같이 학교 앞 카페를 밥 값까지 아껴가며 들렸다. 고등학생때도 해보지 않았던 짓을 대학생이 되서야 하고있는 내 모습이 참, 더럽게도 쪽팔리면서 병신같았는데, 언제나 말끔하게 머리를 묶고서 주문을 받던 너는 참 말갛게도 예뻤다. 참 흔한 표현이긴 한데, 이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말갛던, 너를 보기위해.
질끈 묶은 머리에 매일 바뀌던 프린팅 티. 파트타임이 바뀌던 때에 가면 운좋게도 학교를 마치고 출근하는 너를 볼 수 있었다. 손가락 끝엔 늘 옅게 물감자국이 묻어 있던. 미대생이세요? 어느 날 매일같이 같은 커피를 주문하던 내가 흘리듯 던진 말에 알바생은 익숙히 네 맞아요. 하고 대답했고, 그런 너와 친해진건 그렇게 매일 같이 시덥잖은 질문을 던진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 저 여기 알바 그만 둘거에요. "
너는 뜬금없이 커피를 주문하던 나에게 선언하듯 말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자 커피주문을 마저 하지 못한 나를 대신에 오늘도 아메리카노 맞죠. 하고 주문을 마무리지었다.
" 알바 그만 두면 뭐하게요? "
" 다른 알바를 찾아야죠, 응 "
" 저 때문 아니죠? "
그럴리가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네 모습에 어이없게도 긴장이 풀렸다. 뒤에 손님 기다리세요. 할 말 다했으면 얼른 꺼지라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곤란해 보이는 표정에 급하게 튀어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 마치고 시간, 있어요? "
뻔하디 뻔한, 작업 멘트에 너는 눈이 크게 뜨이고, 잠시, 고민하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를 생각하며 짓는 웃음이 아님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 오늘은 마치고 선약이 있어서요. "
꿈꾸는 듯한 행복한 웃음이 만연했다. 뭐라 말도 못하고, 그래요, 그럼 어쩔수 없죠. 하고 물러 난 나를 위해 너는 직접 커피를 테이블까지 놓아두고 퇴근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한시간은 빠른 퇴근시간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내심 미안했는지, 내 테이블에 들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봐요. 하고 유쾌히 인사를 했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즐거워 보이니, 좋네. 어쩔 수 없이, 코가 꿴 사람 마냥, 즐거워 보이면 된거지. 하고 자기를 합리화 시키고 있을 무렵. 눈으로 쫓던 네가, 멈춰서고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고, 네가 마주한 남자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참 이렇게, 나는 재수가 없다.
***
" 솔직히 말해서 그 때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 응. "
웃기시네, 한 달 동안 같이 놀아 준 사람한테. 놀아준게 아니고 그건 작업이지. 다음 해 여름, 같은 카페에서 점원이 아닌 손님의 신분으로 너는 나와 마주앉았다. 물론 옆 자리엔 탐탁찮은 표정의 사소리도 있었지만. 그런 눈으로 좀 보지마라 너는. 틸틸대는 목소리로 투덜대자 사소리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씹어 삼켰다. 여전히 재수 없는 놈이지.
" 그래도 새삼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야. "
둘이 전혀 뭐랄까, 친구라던가 아닐 줄 알았는데. 알고 있는 사이라는게, 덧붙이는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 아니거든. 동시에 사소리와 내가 입을 모아 대답하자, 구겨지는 인상에 봐봐,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니까. 하고 마무리짓는 너의 괴랄한 센스에 인상이 마저 구겨졌다.
단순히, 고등학교를 같이나온 사이었다. 물론 같은 대학도 다니고 있는 사이긴 했지만. 복도를 지나다가 한 두번 본게 다고, 한 번정도는 같은 반을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다지 없는 기억 속에도 강렬히 남은 이미지는 '재수없다.' 가 다 였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가 없고, 아마 저 놈도 나를 대충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테다. 다만, 고등학교때의, 예의 뭐라 설명하기 힘든, 특유의 침잠할 듯 가라앉을 것 같은 텅빈 분위기는,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있었다. 세월에 깎여나갔는지, 아니면 저도 지쳤는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관심도 없었지만. 누구든 잠깐이라도 사소리를 알았더라면, 눈치 챌 만큼. 그는 제법 행복해 보였다.
너는 그렇게 사소리를 바꿔놨고, 나 역시 불가항력에 가깝게 너에게 물들었다. 너와 나, 단 둘만의 술자리에서 머뭇거리며 마치 아닌 듯 사소리이야기를 들먹이며 연애상담을 하던 너를, 잊을 수가 없다. 너 걔 좋아하지. 한참을 양 볼을 물들이며 떠들던 너는 내말에 쓸데없이 과민반응을 하며 펄쩍 뛰었고, 딱 일주일뒤에 그렇게 됐어. 하며 멋쩍게 웃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래, 행복해 보이면, 됐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만 행복하면 된거라고.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
" 술 나왔습니다. "
알바생은, 테이블까지 오지도 않고 대충 손을 뻗어 주문한 술들을 올려놓고는 사라졌다. 퉁명스러울정도로 정신없이 사라진 알바생의 뒤꽁무니를 좇다가 이내 관뒀다. 쟁그럽게 부딪히는 술병 덕에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언제까지고 멍만 잡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술 받아라. 탁 소리가 나도록 소수잔을 앞에 갖다놓아도 별 반응이 없었지만, 어휴, 씨발. 선심쓰듯 소주병을 대충 흔들다 까고는 들지도 않은 술잔에 따랐다. 조금 넘쳤지만, 그건 잔 안받은 니 잘못이다.
" 자작하면 마주앉은 사람이 재수없대. "
술병을 들고 흔들어보이자 그제야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사소리는 술병을 넘겨받았다. 들고 있는 잔에 아무렇지도 않게 술은 쏟아져 들어오고, 채워진 잔을 그대로 입안으로 쓸어 담았다. 쓴 맛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술은 달았다. 사소리는 예의상 잔을 들어보이기만 했을 뿐 입에 대진 않았다. 취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쩐지, 여전히, 재수없었다.
" 왜 안마셔. "
최대한, 퉁명스럽지않게 물음을 던지자, 사소리는 곧바로 잔을 들어 술을 털었다. 별 표정도 없이 빈잔을 내려놓고, 나는 거기에 다시 술을 따랐다. 술 잔 비면 재수 없어. 그제야 그는 처음으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더니, 긴 한숨을 내뱉는다. 놈을 보고있던 나도 그제서야,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 스스로도 후회 할 말을 입에 담았다. 오기에, 가까운.
" 보통때라면,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데. "
데이다라 말이야. 대충 턱짓으로 사소리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하자, 사소리는 눈에 보이게 인상을 굳혔다. 경계에 가까운 자기보호 반응에, 코웃음이 나온다.
" 걔, 나랑 늘 술 마실 때, 너 이야기 밖에 안 했어. "
굳어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여태껏, 삼년간 눌러왔던 감정은 봇물터지듯 터져나온다. 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만큼, 술기운이 오르는지 훅 하고 끼쳐오는 알콜향이 속을 데웠다. 우습게도, 분노는 아니었다. 올라오는 감정을 밟아 문질러대도, 이제는 포기 할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우습게도 나는 언제나, 늘, 갈망했다.
함부로 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너무 완벽했고, 그 자리에 내가 끼어들 곳은 없었으며, 설사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된다해도, 행복하지 않았으리라. 분명, 생각했다. 그래도,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는 있겠지. 막연히 생각했던 미래 속에 너는 행복했을까. 매사, 망상에 시달리거나, 없을 미래를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너를 마주 할 때면. 발갛던, 볼을 기억하고 있다. 흐리듯 선명하지 않던 유리색을 닮은 눈을 기억하고 있다. 뜯어보듯 훑어내리면 언제나 너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 왜 ' 하고 경계없이 웃었고, 나도 이내 뭐 임마, 하고 웃음을 터트리던 한 때가 분명히 존재했다.
" 너 좋아한다고, 나한테 제일 먼저 말했고. "
정신은, 말짱했다. 술기운에 저질러 내뱉을 만큼,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늘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개의치 않고 자작질을 해 술을 따랐다.
" 참, 내가 저 좋아하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나. "
어찌나, 속이 타들어가던지. 남은 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사소리는, 말이 없었다. 아니, 잘은 모르지만 정확히는,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나로써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는, 화가 나 보였다. 똑바로 나를 쳐다보던 시선이 한 순간 부질 없이 허공에 흩어진다. 언뜻 비친 눈가는 그림 위에 덧칠이라도 한 듯 뭉그러져 보였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그의 표정은 고질적인 반항심에 불을 붙였다.
" 먼저 선수라도 칠 걸 그랬어. "
도발에 가까운 한심한 말에, 황망하던 사소리의 시선은 어느새 차분히 갈무리 되어 있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시선 하나 흔들리지 않았으나, 건들이면 스러져버릴 것 같은 벼랑끝에 몰린 낯선 모습에 이유 모를 자괴감과 함께, 스미듯 올라오는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다. 행복해 보였다. 나는 늘 머리속에 그리기만 했던 그 행복을 모두 만끽했을 놈에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내가 못견디게 부끄러울법도 하건만, 세상이 무너진 것 마냥, 가라 앉고 있는 저놈을, 마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아무리, 놈을 싫어해도 알고있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분명 무시하기 힘들게, 찬찬히,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걸.
술잔을 끌어와 술을 담는 아집에 가까운 내 행동에 사소리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했고, 나는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보란 듯 떠들어대는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따금, 손을 뻗어 담배를 무는 입술이 빨갛게 터 까슬해 보였다. 놈은 데이다라의 이름이 나온 시점부터, 완벽히, 자신 앞에 앉아있는 내 존재를, 지운 듯 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담배 연기를 가만히 뱉는 숨이 뿌옇게 흩어진다. 그리고 이내, 사소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만든 문장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 고백이라도 하지 그랬어. "
시선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고, 지쳐보였다. 만사가 귀찮다는 나른한 어조로 사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학을 하고 있었다.
" 받아 줬을지도 모르잖아. "
그리고 곧바로 마주쳐오는 시선은, 조롱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이, 개새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테이블이 밀려 병이 넘어졌다. 동시에 잡은 멱살에 힘없이 딸려오는 놈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밀려올라왔다. 구역질 마냥, 꾸역꾸역, 몰려오는 열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태껏, 도발을 하던 것은 나였으나, 도발도 아닌, 단 한 마디에 넘어가는 내가 우스웠다. 한심하기 짝이없지.
" 관 둬. "
빈틈없이 멱살을 쥐어잡은 내 손을, 사소리가 힘없이 뿌리쳐냈다. 맥아리도 없이 탁 풀려버리는 내 손을 뒤로하고는, 사소리는 자리를 털었다. 계산은 내가 할게. 끝까지, 아주, 재수가 없다.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한 걸음으로 걸어나가는 놈의 뒷통수를 그저, 황망히, 쳐다보다가. 가게의 손님들의 눈총이 느껴질 때쯤에야, 나도 자리를 떴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방금 계산을 마쳤는지 가게문을 열고 나가는 놈을 따라잡으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야, 이 씨발새끼야! "
간신히 따라잡아 돌려 세운 놈에게, 주먹이라도 꽂아줄 생각으로 호기롭게 올린 주먹은 끝내 주인을 찾지 못했다. 구멍이라도 뚫린 듯 텅 비어버린, 바스라질 듯 그 거지같은 심정을, 이해하는 내가 짜증났다. 아, 도대체 왜, 너는 죽어야 했을까.
" 뭐 언제까지 그러고 살건데, "
비단, 사소리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 왜, 그냥 따라 죽을려고? "
그제야 찌푸려지는 사소리의 인상에, 나는 어딘가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누구에게 나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사소리는 다시, 침묵했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고, 발 밑이 기분나쁘게 질척거렸다. 한심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였다. 왜. 라고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늘, 어김없이 왜 너는, 죽어야 했을까. 물 밀듯 밀려오는 물음은, 해답도 없이 나를 집어삼켰다. 고작,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났을 뿐인데.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을테다.
"... ...미안, "
" 뭐? "
웃기지도 않게, 사소리는 사과를 했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혼자남은 놈이, 무슨 여유가 있어서, 나한테 사과를 했겠는가. 그저, 이 짜증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분명, 고작 옆에서 그들의 행복을 지켜보던 나보다, 당사자인 저 놈이 더, 불쌍했다. 분노는 어느새 동정으로 변한다. 나는 참 추악하다.
" 씨발, 니가 사과하니까 나도 해야할 것 같잖아. "
쥐었던 주먹의 힘을 풀었다. 꽉 쥐고 있던 손마디가 아팠다.
" 나도 미안하다. "
너도, 힘들텐데. 차마, 말을 마저 할 수는 없었다. 이 꼴을 네가 본다면, 둘다 뭐하는 짓이나며, 욕을 한바가지 퍼부었을 텐데. 저 놈의 멱살을 잡은 걸 안다면 나는 죽도록 맞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쌓일 수록 왜 너는 더 선명해지는지.
" ... 가자, 다시 돌아가야지. "
다시금, 네 죽음을 상기하고는 차키를 바로 잡았다. 술은 고작 두잔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라 정신은 말짱했다. 운전, 할 수 있겠지. 자리를 옮겨 차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사소리도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뒷자석에 앉았고, 앉자마자, 피곤한듯 눈을 감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도로는 비어가고 있었고, 물기어린 아스팔트가 시끄럽게 소음을 만들어냈다. 일렁이는 신호등 불빛을 따라 도착한 장례식장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채, 향내음이 가득했다.
갈 곳없이 몰아치던 감정을 모두 갈무리했다.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는 그래도, 편히 갈 수 있도록. 까만 구둣발로, 물기어린 대리석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 짧았던, 너의 여정을 나는 충분히 함께했다. 네가, 행복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 행복이 나의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
" 짐 정리는 했냐? "
모두가 돌아간 시각, 가족을 제외하고는, 놈과 둘만 남은 자리에서 내가 묻자 사소리는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분명,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거겠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을 데이다라의 자리를 침범하는게 못내, 겁이 날 것이다. 그렇게라도 남겨 놓지 않으면 정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게, 온 몸으로 부딪혀 올테니까.
"... 필요하면 불러 "
불필요한 오지랖이라도, 부려야겠다 싶어, 말을 꺼내자, 사소리는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 종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 너 밥은 먹어? "
분명 안 먹겠지만. 데이다라가 그렇게 챙겨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하루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 그래도, 밥은 먹어라. "
분명, 걱정할거야. 이번에는, 뒷 말을 삼키지 않고 분명히 입밖으로 내뱉자, 놈이 까칠하게 그만 해. 제법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더 이상, 이야기하면 맞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쉽게, 잊혀지진 않을거다. 아니, 잊혀질리가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무뎌지지 않을까. 애를 쓰지 않아도, 언젠가 겨울은 지나가겠지. 찬바람이 무뎌질 때 즈음이면, 그래도 봄은 온다. 다만 그 기억을 언제고 다시금 상기하고, 되 짚어내면서, 행복했던 시간을 스스로 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놓아주는 편이 너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본다. 올해 겨울은, 그렇게 천천히 지나 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