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曉

HAPPY NEW YEAR

Rangje 2015. 1. 12. 00:18

사소데이히단 60분 전력


그대 빈자리엔 내가 없네.


비참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되려 담담해진다. 꺼슬한 아스팔트 길을 뒤축이 뭉개져라 꾹꾹 밟으며 걸으면 그 비참함도 같이 꾹꾹, 밟혀 눌리리라 하고 막연히 생각하게 되니까. 하루를 매일 같이 찾아오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덮쳐오는 비참함은 내 정수리를 쪼아댔다. 물빠진 셔츠, 낡은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몸 구석구석 맞춰 신고 현관을 나서면, 그리고 이 지루한 현실에 타협하게 되면, 비로소 나는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아침은, 아니 점심은 베이글로 해야겠다. 막연히 그리 생각하며 콧노래를 부르려 했지만, 나오지 않는다. 코 끝이 시리고 먹먹하다.


-

달력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빨간 볼펜을 들고 고심하듯 한참을 캘린더를 부여잡고 씨름을 하다 결국 내려놨다. 어차피 버릴 달력에 힘을 뭣하러 써. 혼잣말처럼 툴툴대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딱 두 사람분 사이즈의 침대가 꿀렁이다가 멈췄다. 아. 짐이다. 짐. 괜히 방이 좁아보이는 것 같다. 드러누워 보이는 천장은 높다. 아- 씨발. 괜히 욕지기를 뱉다가 주섬 주섬, 몸을 챙겨 다시 앉아 캘린더부터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침대도 쓰레기통에 간단히 처박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의 흔적은 그의 결벽증을 반증하듯 싸그리 없어졌지만, 그 역시도 차마 사라지게 할 수 없었던 가구들은 고스란히 집안에 남아 있었다. 끽해봐야, 침대, 책상. 정도지만. 가장 내 일상에 밀접해 있던 것들이니 좆같지 않을 수가 없다. 십이월 삼십일일. 날짜가 우울하기 그지 없었다. 늘 같은 세상. 고작 날짜하나 바뀌는게 무엇이 그리 대수라고, 벌써부터 거리가 왁자하게 느껴졌다. 


고작 숫자 하나 바뀌는 날, 네자리 숫자중 마지막 끄트머리 숫자 하나가 바뀌는 것. 그 소소하고 의미없는 일 들을 섬기며, 기쁘게 맞았던 올해가 있었다. 아- 또 쓸데없는 생각.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 빈 자리에는 이리도 그득 그득, 그 사람이 쌓여있다. 먼지처럼 털어버릴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그대의 자리에도 먼지만큼, 그 한 톨만큼의 자리가 있었음 좋겠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식어 빠진 베이글을 물어 뜯었다. 


***


가리워진 길 위에 나 홀로 남아


 타임스퀘어 광장은 연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특유의 달뜬 분위기는 붉었다. 노랗기도 했다. 들뜬 분위기에 짓눌려 어깨를 괜히 움츠러들어, 괜히 시선도 낮아진다. 날이 추워 코끝이 꽝꽝 얼었다. 장갑도, 머플러도 챙기지 않았다. 모조리 버렸으니까. 당신의 냄새가 남아있는 것들을 내, 맨정신으로 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긴 만남은, 어째서 이렇게도 짧게 끝이 나는 걸까. 보낸 시간들은 의미가 없었던 걸까. 사소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일일히 환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작년 이맘때에 어울리지도 않게 손을 잡고 털래털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오 듯 마주했던 타임스퀘어에 혼자 자리했다. 


 뉴욕은 화려하다. 눈이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에 미적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눈만, 안 왔으면 좋겠다,응. 아마도 퍼렇게 질려 있을것이 분명한 입술을 벌벌 떨며 달싹였다. 온통, 공기를 가득 메운 환희가 귓전을 때린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걸까. 과거의 나도 즐거웠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더럽게 추워서, 입에 걸린 한 까치가 덩달아 덜덜 흔들린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뱉는 일련의 행동 동안, 시간을 거듭하는 그 시간에도 왁자함은 더해지기만 했다.


 해외에서 살자는 의견은 내가 냈었다. 국내에는 지겨워. 어차피 계속 같이 살텐데 뭐가 문제야. 같은, 말들을 내뱉었던 것 같다. 우습지도 않아. 낯선 환경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그 때는 차마 알지 못했다. 새로운 환경, 낯선 것들. 낯선 사람들. 그런 것들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또, 적응하기 힘들었다기 보다는. 이 동안 몸 담고, 뿌리 내려놓은 것들을 송두리채 뽑아 다시 심는, 그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이리라. 하고. 지금은 생각해 보곤 한다. 바뀐 직장은, 굉장히 바빴다. 내가 아니라. 그가 바빴다. 권태기는 이토록 쉽게 찾아 온다. 섣부른 판단은, 관계를 썩힌다. 모르겠다. 나는.


 헤어지자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안녕. 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서로의 짐을 쌌다. 정확히는 그가 갈무리했다. 내가 종용한 것도, 그가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처럼. 조용히, 간결하게 사라졌다. 줄어든 말 수 만큼, 그를 알 수 없었다. 횟수로만 따져도 천 일이 넘는 시간을 꼬박꼬박 세어나가고 캘린더에 적어 나아가고, 서로의 손을, 온기를 마음을, 다 안다고 생각했어도. 어림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는 가려진 길을, 각자의 길을 걸었었다. 


- 잘 지내.

- 그래.


간결한 단어. 그 다웠다. 단어 만큼 간결한 짐을 단정하게 들고 깔끔하게 현관문이 닫히는 그 광경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아도, 어찌나 이렇게 흐릿해졌는지, 이제는 어쨌는지도 모를만큼. 이다지도 간결한 관계였다. 간결한 관계를 복잡하게 풀어나가니, 자를 수 밖에.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손으로 튕겨 발로 밟았다. 담배도 맛 없네. 


***


그토록, 찾는 그대는 여기에 없네


- Start the countdown ! (카운트 다운을 시작합니다!)


왁자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볼이 발간, 어린아이도, 손을 맞잡고 웃음이 귀에 걸린 연인들도, 혼자는 없다. 부모의 허리춤에 매달려 어쩐지 낯을 가려보이는 아이가 빤히, 나를 쳐다본다. 혼자인게 신기하니. 괜히 아이에게 화풀이하듯 빤히 쳐다보자 아이 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했다. 사사로운 감정같은 것들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추워서 그런가 눈이 어쩐지 시렵다. 아, 좆같다. 집에서 베이글이나 먹을 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괜히 납작하게 눌려버린 꽁초를 발로 문질렀다. 눈만, 눈만 안 왔으면 진짜 존나 좋겠다, 응. 


 작년 새해가 올 때엔, 눈이 왔다. 어울리지도 않게 조르고 졸라 그래도 뉴욕에서는 새해가 엄청난 의미래. 하고 우기듯 그를 끌고나왔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그를 어르고 달래 듯 타임스퀘의 화려함 한 복판에서, 나도 웃음을 귀에 건 연인이었다. 존나 춥다. 그치. 같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을 사람이 있었다. 


- Five! 


카운트다운을 신나게 외치며 그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 Four!


타임스퀘어의 모든 전광판과, 사람들은 어느새 입을 모아 숫자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 꾹, 눌러 참았다.


- Three! 


우리의 권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던 걸까. 마치 운명같은 것이었던 걸까. 피할 수는 없었던 걸까.


- Tow !


고조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어린아이들은 팔짝팔짝, 부모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고, 연인들은 서로의 허리춤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깍지 낀 손들이 빨갛게 달아올라있다. 내 얼굴도, 얼어 터질 듯 빨갛게 익었으리라. 끝내,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과 함께한, 마지막 해가 가고 있었다. 고작 이런 하찮은, 행복 속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 One ! HAPPY NEW YEAR !!


스퀘어의 수많은 전광판이 새해를 알리는 문장으로 화려하게 꾸며지고, 카운트다운을 맡은 공은 빌딩 밑으로 내려왔다. 폭죽이 터지고, 부질없는 종이가루들이 정신없이 쏟아지고. 주변의 연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분위기에 취해 기쁨의 키스를 나누는 연인을 하릴없이 울며 처다보는 내가, 한 없이 찌질해보여 해피뉴이어. 잔뜩 매여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발음했다. 당신이 없는 한 해가 밝았다. 해피, 뉴이어. 다시금 발음하고 고개를 묻었다. 


" 씨발, 존나. 빌어먹을 해피뉴이어다! "

" Happy New Year. "


되먹지도 않은 욕지기까지 뱉으며 소리치자,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자, 알 수 없는 사람이 우뚝서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뭐야 씨발, 누구야. 


" 왜 울어요? "


그는 어쩐지 재밌어보였다. 좋은 날인데. 웃어요. 365일을 보내야하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붙이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다시 한 번 피식, 웃어보이더니 실연이라도 당한 얼굴이네. 여전히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붙였다. 


" 맞아요. 실연당한 거. "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걸로, 새해부터 우나. 새해, 첫 시작인걸. 손목에 걸린 손목시계가 희안하게도 빛을 받아 번쩍였다. 단정한듯, 마구잡이로 넘긴 머리칼이 회보랏빛이었다. 


" 괜찮으면, 첫 시작을 해보는 것도? "


미친놈아냐. 내가 그저 눈만 깜빡이자 그가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 자주빛 눈이 형형했다. 손바닥 좀 줘볼래요? 그는 꽤나 정중치 못한 뉘앙스로 이야기했고, 얼이 빠진 나는 덜덜 떨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다시금 장난스레 웃더니 주머니를 뒤져 펜을 꺼내더니. 엉망진창의 악필로 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 연락해요. "


왜 울었는지는, 그 때 들어줄게요. 그는 장난스레 말을 마무리하고 코트에 손을 찔러넣었다. 


" 추워 보이네, 다음엔 목도리라도 하고 나와요. "


말을 끝으로 그는 뒤로 돌아섰고, 큰 보폭으로 걸어나갔다. 자, 잠시만. 내가 차마 불러세우기도 전에 그는 인파속으로 사라졌고, 온 세상 소음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시끄러운 타임스퀘어의 환희가 고막을 뚫었다. 뭐야. 저 새끼는. 양 볼에 눈물이 미처 마르지도 않아, 시린 양 뺨을 문질러 닦다가, 슬쩍 잉크가 번진 손바닥의 번호를 읽었다. 제비새끼아냐. 미친놈. 


 새해 벽두부터 다들 행복에 겨워 마지않는 시간, 수 많은 인파 속에서 혼자 엉엉 소리내 우는 남자에게 번호를 건내고 가는 남자라니. 결코 제정신은 아니니라.


- 괜찮으면, 첫 시작을 해보는 것도.


장난스레 말린 입꼬리가 뇌리에 남아 괜히 숫자를 남은 손으로 벅벅 문질러 보다 포기했다. 첫 시작같은 소리 하네. 미친놈. 어쩐지. 웃음이 터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