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9. 16:46ㆍnovel/曉
블로그에 쓰던 글들이 있길래 백업목적으로 여기다가.
더 쓰려고 할 것도 있고 아닌것들도 있는 ~.~)9... 내키면 쓰겠지.
심지어 2012년때 글도 있음. 아래로 갈 수록 오래된 글. 누르면 열립니다.
피곤했다. 삼 주간의 여행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저렇게 적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즐겁기도 했고, 녀석과 싸운 횟수도 적어서 제법 만족스러울 여행일 법도 했으나, 크고 작은 예상치도 못한 트러블들과, 차비를 좀 아껴보겠답시고 걸었던 것들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것 같다. 거기에 어이없게도 늦지 않게 출발했던 마지막 날, 이상하게도 여태 밀리기는 커녕 차도 코빼기도 안보이던 도로가 꽉 막히는 기이한 일 부터, 10분만에 승무원을 거의 달달 볶듯 마친 비행기 수속을 뒤로하고 발에 불이 붙도록 뛰어 도착한 게이트 앞에서 여권이 어디있는지 몰라 가방을 뒤엎는 일까지 덥치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버렸다. 마지막날이 아주 정점을 찍는구나.
" 물 마시고 싶어, 응. "
나는 보채 듯 히단을 재촉했다. 물 좀 받아와. 징징대는 목소리로 칭얼대자 놈도 힘들었는지, 있어봐 임마. 나 숨 좀 고르고.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꼬리를 잘랐다. 우선 이거 받아, 하고 짐덩이를 안겨주는 히단놈에게 짜증이 순간 확 치밀어 올랐지만, 저도 힘들겠지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하이고, 집까진 또 어떻게 돌아가.
짐을 대충 갈무리해 좌석에 앉자 마자 몰려오는 피곤함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죽겠다. 나 조만간 죽을거야, 안녕. 하고 농담삼아 이야기하니 히단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겨우 이거 가지고 죽으면 앞으로는 어쩌실려고. 덧붙이는 말을 무시하면서 대충 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키가 차이가 나면 평소에 놀림 받지만, 이런건 좋다. 공짜 베개.
" 나 잘거야, 말걸지 마, 응. "
" 12시간 비행인데, 벌써 자? "
아직 낮인데, 해 떠 있는데. 헛소리를 해대며 장난질을 걸어오는 놈이 슬슬 짜증나서 눈을 감고 대충 아무대나 내리치니 좀 조용해진다. 정말 잘거야? 마지막 물음에 대답하지않자, 저도 지쳤는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는다. 그래, 잠이나 자라. 이놈아.
사실상 이번 여행은 도박에 가까웠다. 나야 여행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고, 이 놈도 마찬가지는 했지만, 문제는 우리의 정신머리는 제법 산만했고, 굳이 길치가 아니더라도 길을 잃을 위험성은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스마트 폰을 내내 붙들고 다니며 길을 찾아 다녔으나 하루에 한번 꼴로는 길을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늘 외국인의 신분을 잊어버리고는 길 한복판에서 자국어로 싸움질을 했다. 눈을 감자 지난 삼주간의 싸움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새삼스럽게 쪽팔린다.
그래도 어찌저찌, 길을 찾아서 밥도 먹고, 볼 건 또 다 보고, 살 것도 다 샀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어쨌거나 여행은 여행이니까,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 놈과 만난지는 일 년 남짓이 되어 가고 있었고, 사실상, 친구로 시작했던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스킨쉽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뭐. 옆에 있으면 재미있으니, 애인의 역할은 잘 하고 있는거겠지. 말투나, 하는 짓은 상스럽고 뺀질거려도, 제법 어디 쯤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긴 하니까. 피곤하긴 한지,
" 아, 그래 물 마신다며. "
입 다문지 얼마됐다고 곧바로 어깨에 얹혀진 내 얼굴을 흔들어대면서 날 깨우기 시작한다. 칭찬 하자 마자 꼭, 욕먹을 짓 해요. 이제 괜찮아. 하고 가물가물 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대답하자 히단놈은 기어이 승무원을 불러 세웠다. 물을 가져다 달라는 말을 전하고, 승무원이 웃으며 사라지자, 이 항공사 스튜디어스 존나 예쁘다. 하는 혼잣말에 기어코 눈을 뜨게 만든다. 야,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따져 물으니 히단은 꼬리를 내렸다. 아니 뭐, 스튜디어스가 예쁘다는 거지.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고는, 승무원이 친절하게 건내는 물을 내쪽으로 들이미는 꼬라지가 보기싫어, 너나 마셔하고 틸틸거렸다. 이 새끼는 칭찬을 해주면 안돼요. 팔짱을 끼고는 아까 물과 함께 받은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진짜 잘거야. 건들이지마. 하고 엄포를 놓자마자,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이륙했다.
***
비행기가 이륙할때 기분은, 뭐랄까 조금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피곤하기까지하니 더욱 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라. 울렁이는 가슴을 눈을 감고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무시했다. 평소에 멀미도 없었는데, 오늘 따라 유독 심하다. 잠이 달아날 만큼, 매스꺼웠던 속은, 일정 고도에 진입하고도 한참 지나서 가라앉았다. 물론, 옆자리에 앉은 놈은 멀미하나 하지 않고 벌써 골아떨어졌다. 그지같은 놈.
비행기모드로 돌려 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대충 확인하자, 대략 두시간은 지난 것 같다. 지독한 멀미에, 피곤함이 배가 되어, 몇 번이나 물을 마셔댔더니 화장실까지 급하다. 아주 골고루 하는구만. 아직 열시간은 비행기를 더 타야하고, 이 좁아터진 이코노미 석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만은, 우선은 화장실부터 다녀와야겠다 싶어 자리를 털었다. 비행기를 한 두번 타보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멀미를 해대는 몸뚱이가 원망스럽기 까지하다.
집 가고싶다. 나지막히 읊조리며 몸을 일으키자 기척에 깼는 지 히단이 어디가, 하고 잠긴 목소리로 묻기에, 화장실 새끼야. 하고 자리를 떴다. 평평한 바닥을 디디며 걸을 때마다 미약하게 현기증이 인다.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귓전을 때리는데 정신이 혼곤했다. 이게 무슨 고생이지. 나름 즐겁다고 생각했던 여행의 추억은 고약한 멀미와 함께 휘발하듯 날아가 버렸다.
내 좌석에서 화장실 까지의 거리는 멀지도 않았다. 통로 끝에 위치해있던 자리였기에 고개만 돌려도 화장실이 보이는 자리였다. 결코, 좋은 자리는 아니지. 한숨을 폭 내쉬며 위태롭게 화장실에 도착했다. 이제 멀미는 가셨고, 세수만 좀 하고 쉬면 될 것 같아. 가볍게 세수만 하고 무거워 열기도 힘든 화장실 문을 온 몸의 체중을 실어 힘껏 밀었다.
***
정신이 들자, 잠도 함께 달아나 버렸다. 눈을 깜빡여도 보고, 몸을 뒤척거리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히단은 여전히 기척도 없이 잠들었있다. 자는 놈을 깨워 놀까, 싶다가도 피곤한가 싶어 관둔다.
나는, 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부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나는 어딘가, 심하게, 결함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고.
***
아침에 눈을 뜨면, 늘 기분은, 그저그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세수를하고, 차려놓은 밥을 억지로 입안으로 밀어넣고, 칫솔질을 한다. 일련의 동작을 마치 짜여진 것 마냥 행하고 나면, 언제나 늘 같은 시간에 길을 나서게 된다. 둘러맨 가방에는 늘, 제대로 읽지도 않는 책들로 가득차 있었다. 길지도 , 짧지도 않은 통학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늘 비슷비슷했고, 나는 늘 지겹게도 사람들의 얼굴을 되짚으며 길을 걸었다. 정리가 덜 된 포장도로에 자잘한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다.
학교의 예비종이 울리기 전에, 나는 간신히 도착해 가방을 내려 놨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배가 약간 아픈 것 같기도하고. 긴 한숨과 함께 가방을 정리해 걸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이 인사를 건내는 무리들에게 그래, 안녕. 하고,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업종이 울렸다.
언제나, 수업시간에는 아무런 생각이 사라진다. 별로 생각하고 싶은 것도 없고,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곤두박질 치던 내 성적은 간신히 과외를 하면서 올라갔으나, 중간에서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늘 그만큼만, 하니까. 지겹다. 의미없이 샤프심을 끊어먹고 있는 날들만 늘어났다.
수업이, 마치는 시각은 오후 다섯시 사십분. 노을이 막 지기 시작한 시간에, 아이들은 가방을 싸 집으로 돌아간다. 나도 마찬가지, 일테지만, 나는 떠나질 못한다. 야자가 없는 학교는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익숙하게 사라지는 발소리를 듣는 것을 나는, 제법 즐겨왔다.
" 거기있냐? "
발 소리가 다 사라지고 난 뒤, 매번 달라지지만, 익숙한 목소리. 이제는 낯설지 않을 법도 한 상황마저도, 나는 좋아한다. 유일하게. 좋아했다.
00.
거리는 온통 안개로 자욱했다. 한적한 길가에 버스 한 두 대가 덜그럭 대는 엔진음을 쏟으며 달리고 있었고, 인도를 끼고 나있는 가게들은 침울한 빛을 내며 껌뻑이고 있었다. 내친김에 가게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하고서 언 손을 녹이며 가게 문을 열자마자 날 선바람이 귓전을 때렸다.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런던의 바람은 겨울과 다를 바가 없어보여, 트렌치코트의 깃을 바짝 세워 올렸다.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냐. 벌써 식어가는 듯 냉랭하게 느껴지는 커피를 대충 입안으로 털어넣으며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충 손목에 매달린 시계를 추스려 시간을 확인 한 그는 급하게 자리를 떠야 함을 상기하고 종종걸음으로 담배연기를 뱉으며 거리 밖으로 사라졌다.
***
히단은 한참 길을 돌아, 마침내 광장에 도착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서 다시금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털었다. 허나 빌어먹게도 라이터의 기름이 모자라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한 그는, 꽤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뒤적거리다 비참하게 장초를 갑 속으로 다시 구겨넣어야 했다. 모난 구두를 혹사시키며 광장을 대강이나마 한 바퀴 둘러보고서야 비로소 라이터가 일으킨 짜증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었고, 그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올려다 본 하늘은 여전히 회색, 바람은 차가웠다.
차마 피지 못한 담배가 든 갑을 만지작거리며 히단은 광장을 마저 걸었다. 광장은 꽤나 사람들이 북적였으며, 반 이상은 관광객으로 보였다. 시답잖게도 모여든 관광객들이 그의 눈엔 다만 징그러워 보였다. 이 나라에 볼게 뭐가 있다고. 펭, 코웃음을 치고는 라이터부터 사러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사람들이 들어찬 광장 허공을 헤매다 간신히 편의점을 찾아냈고, 니코틴 부족으로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다리를 재촉했다. 그러나 곧, 호기롭게 걷던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이 그가 비아냥 거리며 웃어넘긴 여행객이라는 것에 그는 꽤나 놀라웠다. 왜 발걸음을 멈춰세웠는지에 대해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으나, 확실한 것은 그 여행객은 이미 몹시 지쳐보였고, 여행의 기쁨-의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류의 기쁨-마저 송두리 채 빼앗긴 듯 보였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관광객은 한 손에 힘 없이 지도를 들고 있었고, 늘어진 다리에 힘은 남아있어 보이지 않았다. 비단 길을 잃은 것 뿐만 아니라 그의 묘하게 우울한 표정도 그 주변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한 몫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저도 모를정도 빠르게 그 여행객에게 다가갔다. 언제나 크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행하는 그였지만, 현재의 그는 꽤나 치밀했다. 마침 돈도 떨어졌고, 여행객은 꽤나 좋은 돈벌이 수단이 되지 않던가. 특히 지쳐 여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여행객들의 말동무나 되어주면서 길이나 안내하고 받아먹는 돈, 거기에 운이 좋다면 팁도 받을 수 있었고. 더욱이나, 그는 수완 좋은 이른바, 제비이기도 했으니까. 당장에 필요한 돈은 없었으나, 지금 벌어둬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는 혹여나 여행객이 자리를 뜰까, 발걸음을 초조하게 재촉했다. 마침내 그는 온 몸으로 우울을 발산하고 있는 여행객 앞에 섰고, 비스듬히 그림자가 진 여행객의 빛나는 금발은 금세 먹장구름이라도 낀 듯 어둠에 먹혀들어갔다. 히단은 잠깐 숨을 들이켰고, 그동안 고개도 들지 않던 여행객은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의아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빳빳히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상스럽게, 그의 눈은 히단이 생각하던 의문을 담은 눈이 아니었다.
" Can I help you? "
예상하지 못했던 분위기에 다소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먼저 입을 뗀 히단은 여유로웠다. 누가 생각해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인상과 자연스러운 억양, 모로 보더라도 어색해 보이지 않겠지. 자신감이 넘치는 히단과는 달리 그 앞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앉아 있는 여행객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는 아주 당연한 대답을 내놓았다. 허나, 그것은 꽤나 놀라웠고, 위태로운 대답이었다.
" 도와주세요. "
그는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01.
모든 것을 버리고 간 당신은 분명 나보다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홀가분해 보이던 표정과 말투는 고스란히 나에게는 상처가 되었고, 그를 잊겠다고, 어떻게서든 잊어보겠다고 기를 쓰고 노력을 했었다. 그렇게 갖은 노력으로 하루에 네 다섯번은 드밀어 치던 그의 생각은 두어번으로 줄어 들었고, 끝내 삼일에 세 번, 일주일에 한 번, 일년에 두 번. 그는 내 머릿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렇게, 이년 하고 오개월이 지나가는 지금. 그가 내게 소식을 보냈다. 물론, 그가 직접보낸 것이 아닌 그와 아직까지 연락하고 있던 친구의 연락이었지만. 그가 죽었다는 그 심플한, 문장이 나는 왜 그토록 사무쳤을까. 까무룩한 기억 저편의 그는, 잡아챈 내 발목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하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타국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사고였대. 거친 통화음 건너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문장 하나, 하나가. 모든것이, 고통이었다. 무엇을 위해, 당신은 나를 버렸을까. 이상스럽게도 눈물은 털끝 만치도 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 분노에 가까우리라고. 일주일을 웅크리며 살다가 간신히 몸을 챙겨 짐을 쌀때 까지만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겨넣듯이 지워낸 감정들이 봇물 터지 듯 흘러 나오고, 나는 그 미어지는 감정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년 오개월, 짧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나는 그를 완벽히, 잊어버린 것이 아닌, 완벽히, 그를 잃어버렸다.
***
" Can I help you? "
그는 꽤나 느긋해보였다. 색이 빠진 트렌치 코트에 손을 비죽히 찔러 넣고는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꼴이 제법 건방져 보였지만, 그는 완벽한 발음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내 자국어는 그를 제법 당황케 할 법도 했으나, 그는 금세 알아들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그낭 지나칠 수 없었던 건지, 한참을 서있던 그는 끝내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입을 다물고 허공을 멤돌던 시선이 침잠하듯 땅바닥에 꽂힌다. 정말이지 꼴사나웠다.
간신히 도착한 런던의 가을은 여전히 추웠다. 그를 만났던 날도 추웠던 것 같다. 코 끝이 아릿해오는 바람은 겨울의 것을 닮아있다. 싸늘한 바람이 머리칼에 제 자취를 남겨두고 떠났다. 취한 듯 몽롱한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하는 짓이 얼마나,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의 소식을 접하고, 한 달이나 연락을 끊었던 내가, 갑작스럽게 런던으로 떠날거라 선언하자 친구들은 돌아가며 뜯어 말렸다. 네가 그럴 필요까지 있냐. 그들의 짧고, 긴 말들의 맺음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맞아.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지, 응. 나는 어색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다만, 그를 만난 곳에서 그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들린 광장은 제법 북적였고, 나는 다만 지쳤을 뿐이었다. 급하게 잡은 숙소 거리가 먼 탓에, 아픈 다리를 질질 이끌다가 간신히 자리를 찾아 앉고는 광장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그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덮쳐왔을 뿐. 그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이 곳은, 추웠다. 버릴 수도 없는 당신의 기억은 내 마음을 씹어 삼키고 달아나버렸다. 아득해지는 시야에 병신마냥 정신마저 아찔해져오는데, 낯선 언어가, 먹먹해져가는 귓속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내가 길 잃은 관광객으로 보였던지 친절하기 그지없는 런더너의 발길을 잡은 듯 싶었다.
" Hey, are you okay? "
흘러내리는 마음을 붙들어 매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 Oh, sorry. "
제법 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린 그는 그다지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죠,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을 더듬어 영어 단어들을 조합해 이야기하자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아뇨, 뭐 견딜만 했어요. 날이 좋잖아요. 내 영어실력은 유창하지 못하지만 그가 유쾌한 사람이라는 건 장난이 넘치는 그의 얼굴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전혀,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농담에 웃어보였다. 그는 완벽한 영국인의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악센트가 강조되어 강하지만 혹은 부드럽게도 느껴지는 억양은, 그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색이 바래져 오래돼 보이는 트렌치 코트마저도 그에겐 잘 어울려 보였다. 대충 말아올린 듯한 소매 밑단도, 손목에 걸려 메이커를 알 수 없는, 은 시계도.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실밥이 튿어져 너절한 트렌치 코트 주머니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I'm not beggar. 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웃으니, 더 예쁘네요. "
네에, 감사합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자 마자, 지친 생각들 사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
" NO. "
그래보여요? 하고 덧붙이는 영어발음이 제법 얄미웠다.
차게 식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하루 웬 종일 쏟아지는 비에 절로 피곤해졌다. 평소보다 늦은 퇴근시간을 마지막으로 사무실 책상을 뒤로 한 채 지하철로 향하는 거리가 가늠하기 어려울정도로 멀어보인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펴며, 물살을 가르기 무섭게 신발이 젖어왔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날서게 부는 날 간신히, 물이 줄줄 흐르는 우산을 접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내내 미적거리더니 현관에 발을 내자마자 달려와, 오늘, 비온댔어. 아직 딱지가 채 떨어지지도 않은 터진 입술로 나를 타박하며 기어이 내 손에우산을 들려주고선, 기어이 다시 침대속으로 기어들어가던 놈이 애처로웠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 숨이 가쁘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일어났다는 말이 무색하게 잠을 설쳤지만 게의치 않을 만큼 말끔하고 개운한 아침이었다. 눈을 깜빡다 화장실로 향하고, 불을 켜서 칫솔질을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잠기운도 없이 행해졌다. 으슬으슬 추워지는 집안 온도가 제법 싸늘하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는 그 찰나의 시간에, 가을이 엄습했다. 헐어버린 입안을 물로 헹궈내고, 까슬한 입술을 매만지다 이내 다시 박박 문질렀다.
학교에, 가야했다.
***
학교로 향하는 골목길은 늘 푸르렀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졸음에서 깨지 못한 다리를 휘청이며 걸어도, 어둑어둑한 새벽길은 언제나 새롭고 예뻤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어가는 길목의 아침공기가 꽤나 차게 느껴졌다. 한참을 걸어내려 온 아파트단지를 꺾어 도로로 연결된 골목길옆을 걷다가 무심코 돌린 시선끝에 고요 속에 잠긴 공원이 걸리고. 공원에는 어제 저녁과 비등 달라보이지 않는 고요함과 적막함에 휩싸인 채 길잃은 자전거 몇대만 버려진채 세워져있었다. 어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낙서가 가득한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제자리에 멈춰섰다. 까슬까슬한 담벼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다시 모퉁이를 돈다. 어제 부딪힌 어깨가 아파온다. 멍이라도 크게 들었나보다.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집에 도착해서는 이유없이 덜덜 떨리는 몸을 끌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만 한시간 내내 했던 것같다.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발작에 가깝게. 손발이 퉁퉁 불도록 물을 들이붓고는, 얼른 자라는 엄마의 호통을 끝으로 방문을 닫았고 그 이후로는 행동의 궤적조차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나에게 남았던 것은 그 자식의 건방진 목소리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입맞춤이 다였다. 침대에 누워서도, 축축하고 이상한 기분만 계속해서 명치끝을 때렸다. 속이 매슥거리는 것 뿐만은 아닌.
바스락거리는 아스팔트위에 발바닥을 밀듯이 걸었다. 밑창에서 울리는 묘한 떨림이 저릿거리며 발바닥을 때려오는 감각이 썩 나쁘지 만은 않았다. 아직은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따갑게 쪼고, 어물쩡거리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학교에 가서, 뭐라고 먼저 말을 걸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없었던 일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젯밤 간신히, 아주 간신히 선잠에 들기전까지 고민을 하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조 활동을 일년 내내 할 것도 아니고, 잠시 잠깐, 스쳐가는 일이 아니던가. 어제의 일처럼, 아주 잠시 잠깐, 환각 처럼 황망하게 지나가버릴 일이었다.
든 것도 없는 빈 가방에서 달그락 거리며 수저와 필통이 굴러다니는소리가 들린다. 내 머릿 속과 다를 바가 없었다.
***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갈무리해 앉고서는 그대로 책상위로 엎어졌다. 학교생활은 지루하고, 재미도 없었으며, 공부는 취미와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할 꿈도, 목표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었다.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적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게 중간을 지키며 나름대로 잘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고, 한 번쯤 내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된양 떠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막연히 한심하다 여겼다.
01
툭. 건조하기까지 한 둔탁한 책상 울림이, 작은 촉에서 부터 내 손끝까지 전달 되는 듯 했다.
-
선생님 있잖아요. 회고록이라도 이야기 하듯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어 가며 입을 뗐다. 선생님, 선생님. 말 끝마다 혀를 축이 듯, 선생님을 불러가면서. 그는 말이 없이 다만 하얀 옷을 입고 앉아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흰 회진 볼펜을 딸깍 딸깍, 손에 익은 듯 익숙하게 일정한 리듬만 만들어 내고 있을 뿐. 권태롭고, 숨막힐 듯한 일정한 리듬에, 다시 한번.
" 선생님 저는, 강간을 당했어요. "
목을 긁듯이 쏟아 낸 말은 머리를 거치지 못하고 세어 나온 속삭임과 같았다. 선생님. 그의 볼펜소리는 멈출줄을 모르고, 그 감정없는 리듬과는 달리 맞춰오는 눈동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가득 담고 있는 듯 해, 위로라도 받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 장난이에요. "
툭, 볼펜 끝이, 차트위로 곤두박질 친다. 선생님, 선생님. 말 없이, 입만 벙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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