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27. 05:23ㆍnovel/TPT
잔류하는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그런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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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지를 챙기는 그는 어쩐지 조금, 침잠해보였다. 평소에도 그다지 말 수는 없는 편이었지만, 예의, 오늘은 쉽사리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코트를 집어드는 그의 뒤를 따랐다.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가라앉은 침전물을 뒤흔드는 기분이었다. 손을 뻗어 잡을까, 망설이다가 이내 관두려 손을 뒤로 빼자, 어찌 알았는지 바로 맞잡아 오는 손은, 늘 그렇듯 따뜻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괜찮아요? 속삭이듯 물은 물음에 익숙한듯, 익숙지 않은 기다란 침묵의 시간이 늘어진다. 비로소 내 질문이 잔인했다는 걸 깨닫고는 덧잡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가 지내온 삶의 무게를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예측하고, 가늠할뿐이었다. 얼핏 넘겨다본 것들의 자잘한 생채기들을 손끝으로 보듬어가며 끌어 안고 싶었다. 차에 몸을 싣고도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고, 나는 습관처럼 불을 댔다. 탁, 탁. 헛도는 부싯돌 소리가 어쩐지 오늘따라 외롭게만 들렸다. 불이 붙은 담배가 타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담배곽에서 담배를 찾아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오늘은 '그 사람'의 기일이었다.
***
느닷없이, 어제도 평소처럼 시간이 흘렀건만, 어쩐지 조금 침묵이 길었더랬다. 그의 말줄임 안에 든 수 많은 말들을 내가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기에 눈치도 없이 추궁을하자, 어렵게 입을 연 당신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던가. 조금 주저했고, 그 찰나의 순간도, 망설임을 뿌리친 채 빈틈없이 끌어 안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데인 듯 손을 뻗어 얽어 잡자, 그가 조금은 덤덤하게, 하지만 꽤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 줄 수 있겠냐는 물음 앞에, 조금은 기뻤다면 내가 이기적인게 맞으리라.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제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르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해보여요. 얼른 눈 붙여요. 짧은 볼키스를 마지막으로, 어제를 보내주고 맞은 오늘 아침은, 기이할정도로 고요했다.
담뱃불이 타들어가고, 필터 끝자락에 불이 점멸할 때 쯤, 그는 무성의하게 창 밖으로 담배를 던졌다.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핸들을 지켜보다, 나도 이내 담뱃불을 죽였다. 잿더미들이 부셔져 흩날리는 걸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 어느때보다 쉽사리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람이었고, 다시금 변화를 안겨다 준 사람이 아니던가. 구원을 받기엔 그토록 어려웠으나, 다시 그 손을 놓치기엔, 그다지도 쉬운 일이었다는 걸, 그에게 통탄어릴 정도로 잘 알려준 사람이었다. 내 그 사람을 만나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만난다면, 그렇게 가정한다고 해도. 마음이 무거운데, 그는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나로써는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이미 그를 만나고나서부터 찬찬히, 정확하게 들어왔지만, 들을 때마다 이루말하기 힘들게 침잠하는 기분이었다. 늘 데인 듯 급작스레 튀어나오던 그의 삶 곳곳에 들어찬 과거들은 그를 좀 먹듯 배여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였다면 기만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쓰고 싶었다고 해도, 오만이었을테지. 다만 그저, 그렇게 가만히 썩어 들어가기엔, 아까웠다. 내 손에 쥐지 못해 안달이 날 지언정, 그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손에 쥐고 닦아내고 닦아내도, 도려내듯 과거를 잘라낼 수는 없었다. 그 과거를 오롯이 감내할 사람도, 당신이었고.
지금의 그를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 당신은 늘 그렇게 이야기했다. 처음은, 궁금했다. 그래서 늘 어떤-사람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늘 겉핥듯 적당히 이야기를 피했고, 나는 늘 표피 근처에서 표류했다. 거기에, 조바심이라도 났던가. 어린애처럼 유치한 내 마음이 기만이나, 오만을 품었던 것은 자명했다. 오롯이 당신을 내 손으로 바꿨다는, 그런 훈장 같은 것이라도 쥐어주길 바랐나. 내 어린 마음이 조바심을 낼 때마다, 당신은 약하게 웃으며 나를 달랬다.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야. 그렇게 마무리지어지는 이야기의 끝에서도 나는 당신의 '그 사람'을 뛰어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시작된지 모를 상념이 길게 늘어질 즘, 차가 느릿하게, 어딘가에 멈춰섰고, 눈에 마주한 풍경은 주욱 늘어선 묘지들이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여즉까지 별 말이 없던 그는 차문을 열었고 나 역시 차에서 몸을 내렸다. 어쩐지, 각오가 선 표정이기도 했지만, 그는 조금 묘한 표정으로 잔디를 밟았다. 나는 다시금 눈으로 그를 좇다,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윽고 마주한, 묘비에서, 나는 차마 '그 사람'을 마주할 수 없었다. 또, 당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확인 할 수 없었다. 다만 꽉 여물렸다 풀리는 그의 손을 망연히 보다가, 종내, 이해했다. 이것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고는 숙인 고개를 올려 넘겨다 본 당신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평온해보였다. 나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돼서야. 가만히 그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는 알 수 없는, 어쩌면 조금은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한 음절 음절 귓가에 각인되듯 또렷한 당신의 목소리에 손을 세게 쥐었다 어색하게 웃었다. 같잖은 질투로, 덮어질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늘 이렇게나 어리석었다.
그래,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그 사람'을 뛰어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오롯이 나로 채우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고. 당신을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고, 건방진 오만에 대한 나름의 사과를 담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 자리, 피해줄게요. 시간 보내요. "
다시금, 잡은 손을 꼬옥, 잡았다 놓고는.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마주한 그도, 어쩐지 눈가가 붉었으나, 오늘은 모르는 채 넘어가기로 했다. 사박사박, 잔디를 밟으며 조용히 차로 돌아왔다. 그래, 당신을 여기까지 걷게 해준 것도, 여기까지 완성한 것도. 내가 사랑한 당신을 지켜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는 걸, 오, 라울. 나는 탄식처럼 웃었다. 당신을 채운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세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어요.
그가 돌아오면, 붉은 눈가를 꼭, 제 손으로 닦아 줘야겠다. 그리고 꼭 안아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조용히, 기꺼이, 둘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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